서사를 잃은 시대, 인간은 무엇으로 살아가는가 ― 한병철 『서사의 위기』(2023)가 던지는 질문과 과제

1. 스토리는 넘치지만 삶은 왜 더 공허해졌는가 오늘날 우리는 그 어느 시대보다도 많은 이야기를 소비하며 살아간다. SNS에는 개인의 일상이 끊임없이 공유되고, 기업은 브랜드 스토리를 만들어 소비자의 감성을 자극하며, 정치와 언론 역시 사건을 하나의 극적인 이야기로 재구성한다. 겉으로 보면 현대사회는 ‘이야기의 시대’처럼 보인다. 그러나 한병철은 이러한 현상을 오히려 ‘서사의 위기’라고 진단한다. 그가 문제 삼는 것은 이야기의 … 더 읽기

욕망이 만들어낸 감옥 – 다니자키 준이치로 『치인의 사랑』 (1925)

1. 이상적인 여성을 만들고자 한 남자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치인의 사랑』은 겉으로 보기에는 한 남자의 실패한 사랑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인간의 욕망과 집착, 그리고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권력 관계의 역전을 섬세하게 그려낸 소설이다. 다니자키는 일본 근대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서 인간 내면의 욕망과 관능, 아름다움에 대한 집착을 꾸준히 탐구했다. 무엇보다도 그의 소설에는 아름다운 여성에게 매혹된 남성이 종국에는 그 … 더 읽기

야마모토 요시타카, 『일본 과학기술 총력전』(2019) – 체험에서 구조로, 과학기술을 묻다

왜 과학기술이 문제인가 야마모토 요시타카, 『일본 과학기술 총력전』은 과학기술을 ‘발전의 역사’로 서술하지 않는다. 이 책이 겨냥하는 핵심은 과학기술 그 자체가 아니라, 과학기술이 근대 국가의 목표·제도·동원 체계와 결합하면서 형성한 정치적 질서다. 저자는 과학기술을 중립적 도구로 이해하는 통념을 전면적으로 문제 삼으며, 과학기술이 어떻게 책임을 은폐하고 폭력을 합리화하는 장치로 기능해 왔는지를 집요하게 추적한다. 이 문제의식은 이론적 사변에서 비롯된 … 더 읽기

데니스 존슨 『기차의 꿈』(2002), 근대의 꿈과 한 인간의 생애

데니스 존스의 중편소설 『기차의 꿈』은 한 남자의 생애를 다루지만, 그 삶은 곧 미국 근대의 그림자 연대기다. 이 소설은 영웅도, 성공담도, 극적인 자기서사도 제시하지 않는다. 대신 데니스 존슨은 기록되지 않은 노동자의 삶을 따라가며, 국가가 꾸었던 꿈과 개인이 감당해야 했던 시간을 조용히 겹쳐 놓는다. 주인공 로버트 그레이니어는 자신의 부모가 누구인지 알지 못한 채 고모에게 길러진다. 교육은 거의 … 더 읽기

『성의 역사 1권: 지식의 의지』 ― 왜 푸코는 “성은 억압된 적이 없다”고 말했는가

미셸 푸코의 대표작 『성의 역사』는 “성(sex)은 억압되어 왔다”라는 우리가 너무도 당연하게 믿어온 생각을 정면으로 뒤집는 책이다. 『성의 역사』는 총 3권으로 구성되었다. 1권은 지식의 의지 – 근대 사회에서 성이 어떻게 지식과 권력의 대상이 되었는가, 2권은 쾌락의 활용 – 고대 그리스에서 성과 욕망은 어떻게 관리되었는가, 3권은 자기 배려 – 로마 시대, 성을 통해 ‘자기 자신’을 어떻게 다듬었는가가 … 더 읽기

아니 에르노 『부끄러움』(1997) -세계 속에 자신을 인식한다는 것

1. 개인 기억을 사회 구조로 환원하다 아니 에르노의 작품은 자전적 서사를 취하지만, 감정의 고백보다는 기억의 조건을 분석하는 글쓰기에 가깝다. 에르노는 자신의 경험을 “나의 이야기”로 남기지 않고, 한 계급 출신 여성이 어떻게 세계를 인식하게 되었는가라는 질문으로 확장한다. 소설 『부끄러움』에서 그녀는 과거를 회상하는 ‘나’와, 그 과거를 분석하는 ‘현재의 나’를 분리한다. 이 거리두기는 기억을 미화하지 않기 위한 윤리이자, … 더 읽기

장정일 『내게 거짓말을 해봐』(1996)-표현의 자유의 극한 실험

장정일의 문학은 한국 현대문학에서 가장 문제적이면서도 회피할 수 없는 지점을 차지한다. 그는 시·소설·에세이를 넘나들며 일관되게 도덕, 가족, 국가, 예술 제도가 개인의 욕망과 육체를 어떻게 규율하는지를 집요하게 추적해 왔다. 1.반항이 아니라 ‘위험한 실험’으로서의 글쓰기 장정일 문학의 핵심은 단순한 반항이나 저항에 있지 않다. 오히려 그는 “권위에 맞선다”는 도식 자체가 얼마나 쉽게 또 다른 권위로 전화되는지를 의심한다. 그의 … 더 읽기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 『그후』(1909)- 근대의 압박 속 ‘자연의 순리’가 초래한 비극

소설마음의 표지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 『그후』는 일반적으로 『산시로』(1908)의 “그다음 이야기”로 불린다. 그러나 이 작품은 단순한 후일담이 아니라, 근대 일본 사회 속에서 개인이 끝내 선택할 수밖에 없는 윤리적 결단의 순간을 가장 날카롭게 포착한 소설이다. 소설『산시로』가 세계를 관망하는 청년의 눈을 그렸다면, 『그후』는 관망하던 자가 사랑이라는 행위를 통해 사회와 충돌하는 순간을 그린 작품이다. 이 소설에서 소세키는 “사랑은 과연 자연스러운 것인가, 아니면 사회적으로 … 더 읽기

권여선 『봄밤』(2013) – 깊은 육체적 정신적 상처를 안은 자들의 사랑, 봄밤

권여선의 소설 『봄밤』은 중년 이후의 사랑을 다룬 작품이지만, 흔히 기대되는 위로나 성숙의 서사는 없다. 이 소설은 이미 삶에서 여러 차례 탈락한 인물들이 치명적인 병과 함께 살아가다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조용히 따라간다. 그럼에도 이 작품이 깊은 여운을 남기는 이유는, 불행 속에서도 끝내 그들의 관계가 무너지지 않는다. 『봄밤』은 사랑이란 무엇인가를 묻되, 그 답을 감정이 아니라 태도와 책임, … 더 읽기

이주란의 단편소설 「위해」(2021)- 조용히 살아야 하는 사람들의 연대

이주란의 소설은 언제나 큰 사건보다 사라질 듯한 일상, 말해지지 않는 감정, 그리고 관계의 가장 낮은 온도에 주목한다. 그의 인물들은 대개 사회의 중심에서 밀려나 있으며, 자신의 상처를 적극적으로 드러내기보다는 ‘조용히 견디는 방식’을 택한다. 이주란 문학에서 침묵은 결핍이 아니라 하나의 태도이며, 서사의 공백은 독자에게 의미를 추리하도록 요구하는 적극적인 장치다. 이러한 특징은 한국 현대소설에서 드문 저강도 서정성과 윤리적 … 더 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