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여선 『봄밤』(2013) – 깊은 육체적 정신적 상처를 안은 자들의 사랑, 봄밤

권여선의 소설 『봄밤』은 중년 이후의 사랑을 다룬 작품이지만, 흔히 기대되는 위로나 성숙의 서사는 없다. 이 소설은 이미 삶에서 여러 차례 탈락한 인물들이 치명적인 병과 함께 살아가다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조용히 따라간다. 그럼에도 이 작품이 깊은 여운을 남기는 이유는, 불행 속에서도 끝내 그들의 관계가 무너지지 않는다. 『봄밤』은 사랑이란 무엇인가를 묻되, 그 답을 감정이 아니라 태도와 책임, 그리고 믿음으로 제시한다.

1.작가 권여선의 문학적 특성

권여선은 한국 현대소설에서 ‘상처 이후의 삶’을 가장 집요하게 탐구해 온 작가로 평가된다. 그의 소설 속 인물들은 대체로 이미 실패한 관계, 끝난 결혼, 무너진 가족사를 지닌 채 등장한다. 중요한 것은 그 실패의 원인을 설명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작가는 과거를 회상으로 길게 복원하기보다, 현재의 태도와 말투, 관계를 대하는 방식을 통해 인물의 상처를 드러낸다. 또한 권여선의 문학은 연민을 강요하지 않는다. 인물들은 불쌍하지만, 작가는 독자가 그들을 쉽게 동정하거나 구원하지 못하도록 거리를 유지한다. 이러한 절제된 서술은 『봄밤』에서 특히 두드러지며, 병과 죽음이라는 극단적 상황 속에서도 과잉된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2. 병든 몸과 늦게 도착한 사랑의 지속

연경과 수환은 현재 지방의 한 요양병원에서 치료를 받으며 살아간다. 두 사람은 마흔두 살 때, 친구의 재혼 결혼식에서 처음 만났고 이후 십여 년을 함께 살아왔다. 그러나 이들의 만남 이전의 삶은 이미 깊게 망가져 있었다.

수환은 한때 친구와 함께 철공장을 운영했지만, 사업이 부도 위기에 몰리자 재산을 아내 명의로 돌려놓는다. 그러나 그 재산을 쥔 아내는 아무 말 없이 잠적해 버린다. 배신과 파산 이후 수환은 안정된 삶으로 돌아오지 못한 채 각종 허드렛일을 전전한다. 그 과정에서 류마티스 관절염을 앓게 되지만, 경제적·심리적 이유로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해 병은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된다.

연경 역시 삶의 중심을 잃은 인물이다. 그는 국어교사로 일했으나 결혼 후 이른 이혼을 겪고, 하나뿐인 자식마저 전 남편이 해외 이민을 가며 데려가 버린다. 이 사건은 연경에게 치명적인 상실로 남고, 그는 교직을 그만둔 뒤 술에 의존하며 살아간다. 가족에 대한 신뢰는 완전히 무너지고, 삶은 점점 자기 파괴적인 방향으로 흘러간다.

가족과 사회로부터 동시에 밀려난 두 사람은 서로를 통해 겨우 삶을 버텨 왔지만, 병은 그 연대를 끝까지 허락하지 않는다. 결국 두 사람은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지방 요양병원에 함께 입원한다. 주변 사람들은 그들을 ‘알코올 중독자와 관절염 환자의 커플’이라는 의미로 ‘알루 커플’이라 부른다.

연경은 병원에서도 술을 끊지 못한다. 그는 병원의 만류를 무릅쓰고 밖으로 나가 며칠씩 술을 마시다 돌아오곤 한다. 관절염으로 거동이 불편한 수환은 그녀를 붙잡거나 비난하지 않는다. 그는 연경이 좋아하는 일을 하도록 옆에서 지켜만 본다. 그것이 이 둘의 사랑의 방식이다. 그러던 어느 날, 연경은 다시 병원을 나가 여관에서 술을 마시다 쓰러져 돌아오고, 그 사이 수환은 죽음을 맞이한다. 이후 연경은 알코올성 치매 진단을 받고, 마치 수환의 존재를 잊어버린 듯 살아가다 결국 그 또한 죽음을 맞이한다.

3. 가족, 사랑, 그리고 요양병원의 윤리

연경이 두 언니에게 품는 적개심은 소설에서 명확히 설명되지 않는다. 다만 언니들은 자주 찾아오지 못한 것에 대해 미안해하고, 그 미안함은 연경에게 동정으로 왜곡되어 전달된다. 연경이 언니들의 방문을 거부하는 이유는, 그들이 자신의 삶을 이해하기보다 “할 만큼 했다”는 자기 면죄를 얻으려 한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반면 수환의 가족, 특히 어머니와 형은 비교적 담담하게 서술된다. 서술자가 어머니의 이름을 직접 호명하는 방식은, 감정적 미화 없이 수환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려는 거리두기 효과를 만든다.

이 소설에서 사랑의 의미는 젊은 요양사 종우의 이야기를 통해 간접적으로 제시된다. 종우는 수환의 죽음 앞에서 자신의 연애담을 꺼내놓는다. 그는 좋아하던 여자에게 직접 다가가지 못하고, 그 여자의 친구와 먼저 사귀었다가 결국 본래 좋아하던 여자를 만나겠다며 이별을 통보한다. 덤덤히 받아들이던 그 여자는 헤어지는 순간 엄청난 양의 코피를 흘린다. 종우는 그 여자가 연경을 닮았다고 말한다.

이 장면에서 우리는 사랑이 반드시 격렬한 감정 표현만이 아님을 보여준다. 표현되지 못한 감정, 받아들이는 척하지만 사실은 깊이 상처받은 마음, 그것이 오히려 더 깊은 사랑일 수 있는 것이다.

4. 왜 제목은 ‘봄밤’인가

소설 『봄밤』이라는 제목은 이 소설의 정서를 가장 정확하게 포착한다. 봄밤은 사계절 중 가장 애매한 시간이다. 아직 완전히 따뜻하지도, 그렇다고 다시 겨울로 돌아갈 수도 없는 시기다. 수환에게 연경과 함께한 시간은 바로 그런 봄밤이었다. 고통 속에서도 포근했고, 끝이 보였지만 향기는 분명히 존재했다.

이 소설은 말한다. 신체의 망가짐보다 더 소중한 것은 관계이며, 인생의 어느 순간에든 각자의 봄밤은 존재했을지도 모른다고. 『봄밤』은 가장 치명적으로 아픈 인물들을 통해서 사랑이라는 감정의 숭고함을 보여주는 소설이라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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