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자성은 어떻게 권력이 되는가 ― 릴리 출리아라키 『가해자는 모두 피해자라 말한다』(2025)

1.피해자 담론이 지배하는 시대의 역설 오늘날 공적 담론에서 “피해자”라는 말은 가장 강력한 도덕적 언어로 기능한다. 정치인은 법적 책임을 “정치적 탄압”으로 전환하고, 국가와 집단은 비판을 “차별”이나 “자유 침해”로 재명명함으로써 스스로를 피해자로 위치시킨다. 이 과정에서 피해자성은 약자의 고통을 가시화하는 윤리적 개념이 아니라, 정당성과 면책을 동시에 획득하는 권력 장치가 된다. 릴리 출리아라키(Lilie Chouliaraki)는 『가해자는 모두 피해자라 말한다』에서 이 … 더 읽기

정이현 「낭만적 사랑과 사회」 (2002)- 현대사회에서의 낭만적 사랑의 의미

사랑과 성과 사회 작가 정이현은 한국문학에서 ‘사랑을 믿지 않게 된 세대’의 정서를 가장 정밀하게 포착한 작가 중 한 명이다. 당선작인 「낭만적 사랑과 사회」에서 보여주듯이 그녀의 소설 세계는 일관되게 연애·결혼·우정·가족이라는 친밀한 관계들이 더 이상 감정만으로 유지되지 않는 현실을 다룬다.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이 초기작 「타인의 고통」과 「오늘의 거짓말」이다. 이 작품들에서 정이현은 인간관계가 이미 도덕이나 진심의 … 더 읽기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끝내 도움이 되는 것 – 레이먼드 커버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1.작은 행위 속에서 인간적 연대 레이먼드 커버(Raymond Carver, 1938–1988)는 미국 태생의 단편소설가이자 시인으로, 20세기 미국 미니멀리즘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이다. 노동계급의 일상과 인간관계의 균열을 간결하고 절제된 문체로 그려 「대성당」,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말하는 것」 등의 작품으로 큰 영향을 끼쳤다.그의 소설은 말해지지 않는 감정과 침묵의 윤리를 통해, 작은 행위 속에서 인간적 연대가 어떻게 발생하는지를 탐구한 작가로 … 더 읽기

12월 둘째 주 신간 서적

  《라흐마니노프, 피아노의 빛을 따라》 ― 천재라는 신화를 넘어, 노동하는 예술가의 초상  라흐마니노프는 흔히 “비운의 천재”, “낭만주의의 마지막 거장”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이 책은 그 익숙한 이미지에서 한 발 물러나, 망명자이자 생계형 음악가, 그리고 끊임없이 자신을 갱신한 예술 노동자로서의 라흐마니노프를 복원한다. 피오나 매덕스는 전쟁과 혁명으로 조국을 떠나야 했던 라흐마니노프가 미국에서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집요하게 추적한다. 하루에도 … 더 읽기

사랑에 관한 세계 문학가 50인의 말 ― 사랑을 말한 문학적 언어의 깊이

1. 사랑과 인간 사랑은 인간이 가진 감정 중 가장 숭고한 마음에 해당한다. 이는 단순한 애정이나 욕망의 차원을 넘어, 인간이 타자에게 건네는 가장 순수하고 근원적인 에너지다. 고대 신화에서부터 현대 문학에 이르기까지 모든 문학은 사랑을 통해 인간의 본질, 삶의 이유, 존재의 깊이를 탐색해 왔다. 사랑은 인간을 비약적으로 변화시키는 힘이면서 동시에 가장 큰 고통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 이러한 … 더 읽기

감정화 체제와 동아시아 공론장의 구조 변화 – 오쓰카 에이지 『감정화하는 사회』(2020) 중심으로

Ⅰ. 서론 21세기 동아시아 공론장은 감정이 전면에 등장하는 새로운 국면에 진입했다. 정치인은 “국민의 마음”을 호명(呼名)하며 지지를 모으고, 언론은 구조적 분석보다 분노·감동·혐오를 자극하는 콘텐츠를 우선하며, 플랫폼은 이용자들의 감정 반응을 실시간 수집해 알고리즘적으로 강화한다. 이러한 변화는 단순한 사회적 감수성의 변화나 개인 심리의 과잉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오쓰카 에이지는 『감정화하는 사회』에서 이러한 현상을 정치·경제·문화의 중심 원리가 감정으로 재편되는 구조적 … 더 읽기

개념을 훔치는 자와 붕괴하는 세계- 마에카와 도모히로의 희곡 『산책하는 침략자』(2019)

1. ‘보이지 않는 균열’을 드러내는 연극적 사유 마에카와 도모히로(前川知大)는 일본 현대 희곡에서 독보적으로 자리 잡은 창작자로, 극단 이카이(イキウメ)를 기반으로 SF적 상상력과 일상 리얼리즘을 결합하는 문학적 실험을 지속해왔다. 그의 작품들은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에서 인간의 정체성, 사회의 구조적 문제, 집단성과 개인성의 충돌을 탐구한다. 무엇보다도 그는 초자연적 현상을 일상 속에 균열처럼 끼워 넣어, 인간이 가진 세계 인식을 비틀어내는 … 더 읽기

저주가 드러내는 잔혹한 현실- 정보라의 단편소설 「저주토끼」(2023)

민담의 잔혹성과 사회폭력의 결합 정보라는 연세대 인문학부를 졸업한 뒤 예일대·인디애나대에서 러시아·동유럽 문학을 연구한 작가로, 국제적 학문 기반 위에서 독창적인 한국 환상문학을 구축해왔다. 그녀의 문학세계는 민담의 잔혹성, 초현실적 호러,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를 결합한 것이 특징이며, 현실 속 폭력을 환상적 장치를 통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낸다. 단편소설집 『저주토끼』는 이러한 그녀의 문학적 특성이 가장 응축된 작품으로, 부커상 최종 후보에 … 더 읽기

몸, 윤리, 그리고 생존의 정치학- 『되살아나는 자본론』(2024)

1. 자본주의의 균열을 응시하는 문제제기 우치다 다쓰루와 이시카와 야스히로는 『되살아나는 자본론』에서 현대 자본주의를 단순한 경제체제로 파악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본주의가 인간의 삶을 구성해온 모든 기반—노동, 신체, 재생산, 윤리적 관계—를 전면적으로 침식하는 거대한 구조로 바라본다. “자본주의의 윤리적 붕괴와 인간 존재의 위기”라는 문제의식은 매우 선명하게 드러난다. 두 저자는 오늘날 금융화된 자본주의가 노동자의 경제적 생존을 위협할 뿐 아니라, 인간이 … 더 읽기

근대의 그림자 속에서 무너지는 마음- 나스메 소세키 『마음』

나스메 소세키의 『마음』은 근대 일본 문학을 대표하는 동시에, ‘근대 인간의 내면 붕괴’라는 보편적 문제를 가장 예리하게 드러낸 작품으로 평가된다. 이 소설은 단순한 청년과 선생의 관계, 혹은 삼각관계를 통한 비극을 넘어서, 서구식 개인주의와 일본 사회의 급격한 근대 전환이 만들어낸 인간의 고독과 죄책감을 정교한 심리 묘사로 해부한 소설이다. 선생님의 내면에 응축된 배신·불신·윤리적 구속감은 당시 일본 지식인들이 겪던 … 더 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