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에르노 『부끄러움』(1997) -세계 속에 자신을 인식한다는 것

1. 개인 기억을 사회 구조로 환원하다 아니 에르노의 작품은 자전적 서사를 취하지만, 감정의 고백보다는 기억의 조건을 분석하는 글쓰기에 가깝다. 에르노는 자신의 경험을 “나의 이야기”로 남기지 않고, 한 계급 출신 여성이 어떻게 세계를 인식하게 되었는가라는 질문으로 확장한다. 소설 『부끄러움』에서 그녀는 과거를 회상하는 ‘나’와, 그 과거를 분석하는 ‘현재의 나’를 분리한다. 이 거리두기는 기억을 미화하지 않기 위한 윤리이자, … 더 읽기

장정일 『내게 거짓말을 해봐』(1996)-표현의 자유의 극한 실험

장정일의 문학은 한국 현대문학에서 가장 문제적이면서도 회피할 수 없는 지점을 차지한다. 그는 시·소설·에세이를 넘나들며 일관되게 도덕, 가족, 국가, 예술 제도가 개인의 욕망과 육체를 어떻게 규율하는지를 집요하게 추적해 왔다. 1.반항이 아니라 ‘위험한 실험’으로서의 글쓰기 장정일 문학의 핵심은 단순한 반항이나 저항에 있지 않다. 오히려 그는 “권위에 맞선다”는 도식 자체가 얼마나 쉽게 또 다른 권위로 전화되는지를 의심한다. 그의 … 더 읽기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 『그후』(1909)- 근대의 압박 속 ‘자연의 순리’가 초래한 비극

소설마음의 표지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 『그후』는 일반적으로 『산시로』(1908)의 “그다음 이야기”로 불린다. 그러나 이 작품은 단순한 후일담이 아니라, 근대 일본 사회 속에서 개인이 끝내 선택할 수밖에 없는 윤리적 결단의 순간을 가장 날카롭게 포착한 소설이다. 소설『산시로』가 세계를 관망하는 청년의 눈을 그렸다면, 『그후』는 관망하던 자가 사랑이라는 행위를 통해 사회와 충돌하는 순간을 그린 작품이다. 이 소설에서 소세키는 “사랑은 과연 자연스러운 것인가, 아니면 사회적으로 … 더 읽기

권여선 『봄밤』(2013) – 깊은 육체적 정신적 상처를 안은 자들의 사랑, 봄밤

권여선의 소설 『봄밤』은 중년 이후의 사랑을 다룬 작품이지만, 흔히 기대되는 위로나 성숙의 서사는 없다. 이 소설은 이미 삶에서 여러 차례 탈락한 인물들이 치명적인 병과 함께 살아가다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조용히 따라간다. 그럼에도 이 작품이 깊은 여운을 남기는 이유는, 불행 속에서도 끝내 그들의 관계가 무너지지 않는다. 『봄밤』은 사랑이란 무엇인가를 묻되, 그 답을 감정이 아니라 태도와 책임, … 더 읽기

이주란의 단편소설 「위해」(2021)- 조용히 살아야 하는 사람들의 연대

이주란의 소설은 언제나 큰 사건보다 사라질 듯한 일상, 말해지지 않는 감정, 그리고 관계의 가장 낮은 온도에 주목한다. 그의 인물들은 대개 사회의 중심에서 밀려나 있으며, 자신의 상처를 적극적으로 드러내기보다는 ‘조용히 견디는 방식’을 택한다. 이주란 문학에서 침묵은 결핍이 아니라 하나의 태도이며, 서사의 공백은 독자에게 의미를 추리하도록 요구하는 적극적인 장치다. 이러한 특징은 한국 현대소설에서 드문 저강도 서정성과 윤리적 … 더 읽기

옥타비아 버틀러의 『킨(Kindred)』(1979)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상처의 서사

옥타비아 버틀러의 작품세계는 과학기술의 미래를 예언하기보다 권력과 생존, 역사와 신체가 인간을 어떻게 규정하는지를 탐구하는 데 초점이 있다. 『킨(Kindred)』가 노예제의 기억을 시간여행으로 현재에 소환했다면, 『패턴마스터(Patternmaster)』 연작은 초능력 사회를 통해 지배와 복종의 구조를 드러낸다. 『파라블 시리즈(Parable)』에서는 붕괴하는 미국 사회 속에서 신앙과 공동체의 재구성을 묻고, 『블러드차일드(Bloodchild)』는 공생이라는 이름의 폭력을 날카롭게 해부한다. 버틀러의 소설들은 언제나 약자의 시선에서 세계를 바라보며, … 더 읽기

정이현 「낭만적 사랑과 사회」 (2002)- 현대사회에서의 낭만적 사랑의 의미

사랑과 성과 사회 작가 정이현은 한국문학에서 ‘사랑을 믿지 않게 된 세대’의 정서를 가장 정밀하게 포착한 작가 중 한 명이다. 당선작인 「낭만적 사랑과 사회」에서 보여주듯이 그녀의 소설 세계는 일관되게 연애·결혼·우정·가족이라는 친밀한 관계들이 더 이상 감정만으로 유지되지 않는 현실을 다룬다.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이 초기작 「타인의 고통」과 「오늘의 거짓말」이다. 이 작품들에서 정이현은 인간관계가 이미 도덕이나 진심의 … 더 읽기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끝내 도움이 되는 것 – 레이먼드 커버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1.작은 행위 속에서 인간적 연대 레이먼드 커버(Raymond Carver, 1938–1988)는 미국 태생의 단편소설가이자 시인으로, 20세기 미국 미니멀리즘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이다. 노동계급의 일상과 인간관계의 균열을 간결하고 절제된 문체로 그려 「대성당」,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말하는 것」 등의 작품으로 큰 영향을 끼쳤다.그의 소설은 말해지지 않는 감정과 침묵의 윤리를 통해, 작은 행위 속에서 인간적 연대가 어떻게 발생하는지를 탐구한 작가로 … 더 읽기

개념을 훔치는 자와 붕괴하는 세계- 마에카와 도모히로의 희곡 『산책하는 침략자』(2019)

1. ‘보이지 않는 균열’을 드러내는 연극적 사유 마에카와 도모히로(前川知大)는 일본 현대 희곡에서 독보적으로 자리 잡은 창작자로, 극단 이카이(イキウメ)를 기반으로 SF적 상상력과 일상 리얼리즘을 결합하는 문학적 실험을 지속해왔다. 그의 작품들은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에서 인간의 정체성, 사회의 구조적 문제, 집단성과 개인성의 충돌을 탐구한다. 무엇보다도 그는 초자연적 현상을 일상 속에 균열처럼 끼워 넣어, 인간이 가진 세계 인식을 비틀어내는 … 더 읽기

저주가 드러내는 잔혹한 현실- 정보라의 단편소설 「저주토끼」(2023)

민담의 잔혹성과 사회폭력의 결합 정보라는 연세대 인문학부를 졸업한 뒤 예일대·인디애나대에서 러시아·동유럽 문학을 연구한 작가로, 국제적 학문 기반 위에서 독창적인 한국 환상문학을 구축해왔다. 그녀의 문학세계는 민담의 잔혹성, 초현실적 호러,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를 결합한 것이 특징이며, 현실 속 폭력을 환상적 장치를 통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낸다. 단편소설집 『저주토끼』는 이러한 그녀의 문학적 특성이 가장 응축된 작품으로, 부커상 최종 후보에 … 더 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