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에르노 『부끄러움』(1997) -세계 속에 자신을 인식한다는 것

1. 개인 기억을 사회 구조로 환원하다 아니 에르노의 작품은 자전적 서사를 취하지만, 감정의 고백보다는 기억의 조건을 분석하는 글쓰기에 가깝다. 에르노는 자신의 경험을 “나의 이야기”로 남기지 않고, 한 계급 출신 여성이 어떻게 세계를 인식하게 되었는가라는 질문으로 확장한다. 소설 『부끄러움』에서 그녀는 과거를 회상하는 ‘나’와, 그 과거를 분석하는 ‘현재의 나’를 분리한다. 이 거리두기는 기억을 미화하지 않기 위한 윤리이자, … 더 읽기

담론이란 무엇인가? – 철학자들의 담론 이론을 중심으로

‘담론(disourse)’은 단순한 말이나 토론을 뜻하지 않는다. 철학자들은 담론을 지식·권력·이데올로기·주체 형성과 깊게 연결된 개념으로 분석해 왔다. 1. 미셸 푸코 – 담론은 지식이자 권력이다 담론 이론에서 가장 중요한 철학자는 단연 미셸 푸코다. 푸코에게 담론은 단순한 언어가 아니라 지식을 생산하고 사회를 통제하는 권력의 장치이다. 푸코는 『지식의 고고학』과 『감시와 처벌』 등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담론은 사물을 말하게 만드는 규칙이며, … 더 읽기

장정일 『내게 거짓말을 해봐』(1996)-표현의 자유의 극한 실험

장정일의 문학은 한국 현대문학에서 가장 문제적이면서도 회피할 수 없는 지점을 차지한다. 그는 시·소설·에세이를 넘나들며 일관되게 도덕, 가족, 국가, 예술 제도가 개인의 욕망과 육체를 어떻게 규율하는지를 집요하게 추적해 왔다. 1.반항이 아니라 ‘위험한 실험’으로서의 글쓰기 장정일 문학의 핵심은 단순한 반항이나 저항에 있지 않다. 오히려 그는 “권위에 맞선다”는 도식 자체가 얼마나 쉽게 또 다른 권위로 전화되는지를 의심한다. 그의 … 더 읽기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 『그후』(1909)- 근대의 압박 속 ‘자연의 순리’가 초래한 비극

소설마음의 표지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 『그후』는 일반적으로 『산시로』(1908)의 “그다음 이야기”로 불린다. 그러나 이 작품은 단순한 후일담이 아니라, 근대 일본 사회 속에서 개인이 끝내 선택할 수밖에 없는 윤리적 결단의 순간을 가장 날카롭게 포착한 소설이다. 소설『산시로』가 세계를 관망하는 청년의 눈을 그렸다면, 『그후』는 관망하던 자가 사랑이라는 행위를 통해 사회와 충돌하는 순간을 그린 작품이다. 이 소설에서 소세키는 “사랑은 과연 자연스러운 것인가, 아니면 사회적으로 … 더 읽기

교제살인은 왜 반복되는가?

교제살인은 오랫동안 ‘사적인 관계에서 벌어진 비극적 사건’으로 취급돼 왔다. 연인 사이의 갈등, 이별 후의 충동, 감정 통제 실패라는 설명은 교제살인을 개인의 문제로 축소해왔다. 그러나 최근 공개된 정부 공식 통계는 이러한 인식이 얼마나 현실과 동떨어져 있었는지를 분명히 보여준다. 성평등가족부가 발표한 2025년 여성폭력 통계에 따르면, 2024년 한 해 동안 전·현 배우자 또는 연인 관계에서 살인 혹은 살인미수로 … 더 읽기

권여선 『봄밤』(2013) – 깊은 육체적 정신적 상처를 안은 자들의 사랑, 봄밤

권여선의 소설 『봄밤』은 중년 이후의 사랑을 다룬 작품이지만, 흔히 기대되는 위로나 성숙의 서사는 없다. 이 소설은 이미 삶에서 여러 차례 탈락한 인물들이 치명적인 병과 함께 살아가다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조용히 따라간다. 그럼에도 이 작품이 깊은 여운을 남기는 이유는, 불행 속에서도 끝내 그들의 관계가 무너지지 않는다. 『봄밤』은 사랑이란 무엇인가를 묻되, 그 답을 감정이 아니라 태도와 책임, … 더 읽기

페미니즘 리부트(Feminism Reboot)란 무엇인가

페미니즘 리부트

2010년대 중반 이후 한국 사회에서 가장 자주 언급된 사회 담론 중 하나가 바로 ‘페미니즘 리부트(Feminism Reboot)’이다. 뉴스, SNS, 유튜브, 대학 강의실, 직장과 일상 대화까지 페미니즘은 더 이상 특정 집단의 이론이나 운동이 아니라 사회 전반의 핵심 키워드가 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많은 사람들이 묻는다. “페미니즘은 예전부터 있지 않았나?”, “왜 굳이 ‘리부트’라는 말을 쓰는 걸까?” 이 질문에 답하기 … 더 읽기

이주란의 단편소설 「위해」(2021)- 조용히 살아야 하는 사람들의 연대

이주란의 소설은 언제나 큰 사건보다 사라질 듯한 일상, 말해지지 않는 감정, 그리고 관계의 가장 낮은 온도에 주목한다. 그의 인물들은 대개 사회의 중심에서 밀려나 있으며, 자신의 상처를 적극적으로 드러내기보다는 ‘조용히 견디는 방식’을 택한다. 이주란 문학에서 침묵은 결핍이 아니라 하나의 태도이며, 서사의 공백은 독자에게 의미를 추리하도록 요구하는 적극적인 장치다. 이러한 특징은 한국 현대소설에서 드문 저강도 서정성과 윤리적 … 더 읽기

옥타비아 버틀러의 『킨(Kindred)』(1979)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상처의 서사

옥타비아 버틀러의 작품세계는 과학기술의 미래를 예언하기보다 권력과 생존, 역사와 신체가 인간을 어떻게 규정하는지를 탐구하는 데 초점이 있다. 『킨(Kindred)』가 노예제의 기억을 시간여행으로 현재에 소환했다면, 『패턴마스터(Patternmaster)』 연작은 초능력 사회를 통해 지배와 복종의 구조를 드러낸다. 『파라블 시리즈(Parable)』에서는 붕괴하는 미국 사회 속에서 신앙과 공동체의 재구성을 묻고, 『블러드차일드(Bloodchild)』는 공생이라는 이름의 폭력을 날카롭게 해부한다. 버틀러의 소설들은 언제나 약자의 시선에서 세계를 바라보며, … 더 읽기

일본인의 기원, 고대 게놈이 밝힌 일본인 인구의 3중 구조 기원

1.일본인은 어디에서 왔는가? ‘일본인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단순한 역사 논쟁을 넘어 정체성과 깊이 연관된다. 오랫동안 일본 학계와 대중사회에서는 조몬인과 야요이인의 혼합으로 일본인이 형성되었다는 ‘이중 구조론’이 정설처럼 받아들여져 왔다. 그러나 2021년, 이 오래된 통설을 근본적으로 수정하는 연구 결과가 발표되었다. 도쿄대학교를 중심으로 한 국제 공동 연구팀은 고대 인골의 전장(全長) 게놈 분석을 통해 일본인의 기원이 단순한 ‘두 갈래’가 아니라 … 더 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