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쓰메 소세키의 소설 『그후』는 일반적으로 『산시로』(1908)의 “그다음 이야기”로 불린다. 그러나 이 작품은 단순한 후일담이 아니라, 근대 일본 사회 속에서 개인이 끝내 선택할 수밖에 없는 윤리적 결단의 순간을 가장 날카롭게 포착한 소설이다. 소설『산시로』가 세계를 관망하는 청년의 눈을 그렸다면, 『그후』는 관망하던 자가 사랑이라는 행위를 통해 사회와 충돌하는 순간을 그린 작품이다. 이 소설에서 소세키는 “사랑은 과연 자연스러운 것인가, 아니면 사회적으로 처벌받아야 할 죄인가”라는 질문을 우리에게 던진다.
1. 나쓰메 소세키의 문학세계 ― 근대 일본과 ‘살 수 없는 개인’
나쓰메 소세키의 문학은 메이지 일본이 겪은 근대화의 성공담과 정반대의 방향에서 출발한다. 국가와 사회는 눈부시게 근대화되었지만, 그 과정에서 개인은 점점 숨 막히는 존재가 되었다. 소세키는 바로 이 지점, 즉 국가·가문·도덕·경제 논리가 개인의 삶을 압도하는 구조에 집요하게 천착했다.
소세키 문학의 중심에는 항상 ‘살 수 없는 인간’이 있다. 그들은 무능해서가 아니라, 사회가 요구하는 방식으로는 정직하게 살 수 없기 때문에 방황한다. 『마음』의 선생, 『문』의 소스케, 그리고 『그후』의 다이스케는 모두 이 계열에 속한다. 이 인물들은 사회적 성공을 거부하거나, 혹은 애초에 사회의 규칙에 편입되지 못한 채 내면의 윤리와 외부의 도덕 사이에서 갈등한다. 소세키가 특히 예민하게 포착한 것은 결혼·가족·인간관계가 만들어내는 압력, 그리고 근대 사회에서 강화되는 자기중심성(egocentrism)·불신·위선이 개인의 감정과 삶을 어떻게 부식시키는가 하는 문제였다. 특히 소설『그후』는 소세키 문학 가운데서도 가장 급진적이다. 왜냐하면 이 소설에서 주인공은 아무것도 하지 않던 상태에서, 단 하나의 선택만은 끝까지 밀어붙이기 때문이다. 그 선택이 바로 ‘사랑’이다.
2. 아무것도 하지 않던 남자가 선택한 단 하나
소설 『그후』의 주인공 다이스케는 서른 살의 미혼 남성이다. 그는 집안의 경제적 지원을 받으며, 직업 없이 도쿄에서 유유자적한 삶을 산다. 겉으로 보기에 그는 무위도식하는 고등 룸펜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그는 사회가 요구하는 삶의 방식 자체를 불신하는 인물이다.
그의 평온한 일상은 대학 동창 히라오카의 방문으로 균열을 맞는다. 히라오카는 3년 전 다이스케의 적극적인 중매로 그의 다른 친구의 여동생인 미치요와 결혼한 인물이다. 그러나 오사카에서의 직장 생활은 실패로 끝났고, 불경기 속에서 그는 도쿄로 돌아와 실업 상태에 놓인다. 미치요는 생계의 압박 속에서 다이스케에게 경제적 도움을 청하며, 세 사람의 관계는 다시 얽히기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 다이스케는 깨닫게 된다. 자신이 3년 전 이미 미치요를 사랑하고 있었다는 사실, 그리고 그 사랑을 애써 외면한 채 친구의 결혼을 도왔다는 사실을 말이다. 히라오카가 신문사에 취직한 이후 미치요를 대하는 태도, 그녀가 처한 궁핍한 현실은 다이스케의 내면에 잠들어 있던 감정을 다시 흔들어 깨운다.
한편 집안에서는 끊임없이 다이스케에게 결혼을 강요한다. 아버지와 형은 이미 유력한 혼처를 정해놓았고, 결혼은 가문의 이해와 경제 논리 속에서 추진된다. 그러나 다이스케는 이유를 설명하지 않은 채 이를 완강히 거부한다. 그는 아버지처럼 자연의 순리를 인간의 계획으로 억지로 재단하는 삶을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미치요와의 만남이 반복되면서 두 사람은 결국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다. 미치요 역시 결혼 이전부터 다이스케를 사랑하고 있었으며, 현재의 결혼 생활에 깊은 염증을 느끼고 있었다. 다이스케가 “앞으로는 가난해질 수 있고, 사회적 비난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하자, 미치요는 “죽어버리면 그만”이라고 답한다. 이 말은 사랑의 과장이 아니라, 사랑 없는 삶이 이미 죽음과 다름없다는 절망의 표현이다.
다이스케는 모든 책임을 지겠다고 결심한다. 그는 히라오카에게 직접 사실을 밝히고, 어떤 결과도 감당하겠다고 말한다. 결국 히라오카는 다이스케의 아버지에게 편지를 보내 모든 사실을 폭로하고, 다이스케는 집안에서 내쫓긴다. 경제적 지원은 끊기고, 그는 사회적으로도 도덕적 비난의 대상이 된다.
소설의 마지막, 병든 미치요를 보내주겠다는 말만 남긴 채 히라오카는 그녀를 다이스케로부터 차단한다. 다이스케는 미치요의 집 주변을 배회하지만 만나지 못하고 형으로부터 집안과의 절연을 통보받는다. 그리고 그는 세상이 흔들리는 감각 속에서, 완전히 고립된 개인으로 남는다.
3. “왜 일하지 않느냐”의 진짜 의미 ― 개인의 게으름이 아니라 ‘근대의 구조’에 대한 항변
“왜 일하지 않느냐고? 그건 내 탓이 아니야. 즉 세상 탓이지. 좀 더 과장해서 말하자면 일본과 서양의 관계에 문제가 있어서 일하지 않는 거네. 우선 일본만큼 빚이 많아 어려움을 겪는 나라는 없을 것이네. 자넨 그 빚을 언제쯤 갚을 수 있을 것 같아? 그야 외채 정도는 갚을 수 있겠지. 하지만 빚은 그뿐만이 아닐세. 일본은 서양에서 빚을 얻지 못하면 도저히 일어설 수 없는 나라야. 그런데도 선진국이라고 자처하고 있지. 억지로라도 선진국 대열에 끼려고 하지. 그러니 여러 방면에서 깊이보다 선진국처럼 넓이만 벌려놓는 거야. 무리하게 벌려놓으니 더욱 비참한 거야. 소하고 경쟁하는 개구리처럼 이제 곧 배가 터지고 말 걸세. 그 피해는 모두 우리 개인이 입게 될 테니 두고 보게. 이렇게 서양의 압박을 받고 있는 국민은 머릿속에 여유가 없으니 제대로 된 일은 할 수가 없지.”(104쪽)
히라오카는 다이스케에게 사실상 근대 사회의 표준 질문을 던진다. “왜 일하지 않느냐.” 이에 대해 다이스케는 “내 탓이 아니라 세상 탓”이라고 말하며, 더 나아가 “일본과 서양의 관계”를 끌어온다. 얼핏 허풍 같지만, 소세키가 이 말을 길게 배치한 이유는 분명하다. 다이스케의 무위는 단순한 나태가 아니라, ‘근대화의 압박이 개인에게서 여유와 진정성을 빼앗는다’는 문제의식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소세키는 근대 일본인의 심리에 생기는 균열, 즉 서구식 개인주의의 유입이 낳는 불안과 소외가 그의 작품 세계를 관통한다는 식으로 자주 논의되어 왔다.
다이스케가 “소하고 경쟁하는 개구리”라는 비유로 묘사하는 것은, 근대 국가가 ‘선진국 흉내’를 내며 외형만 무리하게 확장하는 모습이다. 이때 “피해는 모두 우리 개인이 입게 된다”는 그의 말은 작품의 윤리적 기조와 직결된다. 소세키는 ‘국가의 성장’이 ‘개인의 행복’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점을, 다이스케의 입을 빌려 폭로한다. 즉 다이스케가 노동을 회피하는 것은 “일하기 싫어서”가 아니라, 사회가 요구하는 방식의 노동(편입) 자체가 인간을 파괴한다는 직감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그 직감은 곧 “자연의 순리”라는 관념(억지로 꾸민 계획과 제도를 불신하는 태도)으로 굳어진다.
4. 자연의 순리 vs 사회의 순리 ― 아버지의 ‘계획’이 폭력이 되는 순간
그는 아버지와 달리 처음부터 어떤 계획을 세워 자연의 순리를 강제로 자신의 계획에 맞추려 드는 앞뒤가 막힌 사람은 아니었다. 자연의 순리란 인간이 세운 어떤 계획보다도 위대한 것이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버지가 자연의 순리를 거역하고 자신의 계획을 고집한다면 그건 버림받은 아내가 이혼장을 무기로 부구관계를 증명하려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버지에게 그런 논리를 펼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아버지를 놀리로 공격한다는 건 곤란함 중의 곤란함이었다. 설사 그 곤란함을 무릎써봤자 다이스케에게 득이 될 일은 없었다. 그 결과 아머지의 역정만 살 뿐 이유를 말하지 않고 결혼을 거부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218쪽)
다이스케 독백은 『그후』의 핵심 대립축을 가장 이론적으로 정리한다. 다이스케는 아버지가 “처음부터 계획을 세워 자연의 순리를 강제로 자신의 계획에 맞추려 드는” 인간이라고 본다. 여기서 자연의 순리는 단순히 자연주의적 낭만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감정·관계·시간의 흐름을 ‘거래’나 ‘처방’으로 환원하는 근대적 합리성에 대한 반감이다. 특히 아버지가 강요하는 결혼은 ‘사랑’의 문제가 아니라 ‘가문 운영’과 ‘안전한 투자’의 문제로 취급된다. 소세키는 결혼을 이런 방식으로 밀어붙이는 가족제도를, 개인을 길들이는 가장 강력한 장치로 그린다.
그런데 다이스케는 아버지를 논리로 설득하지 않는다. “아버지를 논리로 공격한다는 건 곤란함 중의 곤란함”이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서, 근대 가족 내 권력의 비대칭을 드러낸다. 논쟁은 가능하지만, 승리는 불가능하다. 이유를 말하는 순간 다이스케는 ‘불효’와 ‘파격’의 언어로 분류되고, 아버지는 도덕과 경제라는 양손의 무기로 아들을 제압할 수 있다. 그래서 다이스케는 말 대신 침묵과 거부를 택한다. 이 침묵은 비겁함이 아니라, 사회적 언어가 이미 아버지 편으로 기울어진 세계에서의 최소한의 저항 방식이다.
5. “백합” 장면의 미학과 함정 ― 욕망 없는 평온은 가능한가
‘오늘 처음으로 자연스러웠던 옛날로 돌아가는군.’
그런 생각을 하자 그는 온몸에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평온함을 느꼈다. 왜 좀 더 일찍 돌아갈 수 없었던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부터 왜 자연스러운 흐름에 저항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는 빗속에서, 백합 속에서, 다시 살아난 과거 속에서 순수하고 평화로운 생명을 발견했다. 그 생명은 어디에도 욕망은 없었다. 이해관계도 없었다. 자신을 압박하는 도덕도 없었다. 구름과 같은 자유와 물과 같은 자연이 있었다. 그리고 모든 것이 행복했다. 다라서 모든 것이 아름다웠다. (260쪽)
다이스케는 “구름과 같은 자유와 물과 같은 자연”을 체감하며, 욕망도 이해관계도 도덕의 압박도 없는 “순수하고 평화로운 생명”을 발견했다고 느낀다. 이 장면은 『그후』의 정서적 정점이다. 다이스케가 꿈꾸는 자연의 순리는 여기서 가장 아름다운 언어로 형상화된다.
하지만 이 아름다움은 동시에 함정이다. 왜냐하면 다이스케가 “옛날로 돌아간다”고 느끼는 그 순간은, 사실상 사회로부터 추방될 준비를 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그는 도덕과 이해관계가 없는 세계를 꿈꾸지만, 현실에서 사랑은 반드시 이해관계(생계, 거처, 지위)와 충돌한다. 백합은 순수의 표상이면서, 동시에 현실을 잠시 마비시키는 ‘미학적 마취’다. 소세키는 독자가 다이스케의 순수에 매혹되도록 허락하면서도, 곧이어 그 순수가 어떤 대가를 치르게 되는지 냉정하게 보여준다. 이 이중 구조가 『그후』를 단순한 연애소설이 아니라 ‘윤리 소설’로 만든다.
6. “형벌과 축복”의 의미 ― 소세키가 사랑을 ‘윤리의 회복’으로 그리는 방식
“ 하는 수 없군요. 마음의 결정을 내려야겠어요.”
다이스께는 등에 찬물을 뒤집쓴 듯 덜렸다. 사회로부터 추방당할 두 사람의 영혼은 단둘이 마주하고 서로를 둟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모든 것을 거역하고 서로를 하나로 묶으려는 어떤 힘을 두려워하며 몸을 떨었다. — 중략 — 그들은 사랑의 형벌과 축복을 동시에 받으며 동시에 그 두 가지를 절실하게 음미했다.(271쪽)
다이스케와 미치요는 “사회로부터 추방당할 두 사람의 영혼”으로 서로를 응시하며, “모든 것을 거역하고 서로를 하나로 묶으려는 어떤 힘”을 두려워한다. 그리고 소세키는 이를 “사랑의 형벌과 축복”이라고 부른다. 여기서 결정적인 포인트는, 사랑이 단지 감정이 아니라 행동이며, 그 행동이 사회 질서에 의해 처벌될 수밖에 없는 구조에 놓인다는 사실이다.
흥미로운 것은, 연구자들이 『그후』의 이 ‘부도덕해 보이는 사랑(간통/불륜의 구조)’을 오히려 근대의 윤리 붕괴 속에서 윤리를 되찾으려는 행위로 읽기도 한다는 점이다. 즉 에도적 윤리가 해체되고 메이지적 근대가 가치 공백을 만들었을 때, 소세키는 ‘사랑’을 윤리적·영웅적 행위의 장소로 잠시 복권시키지만, 동시에 그 서사가 정서적으로 붕괴하는 지점까지 함께 제시한다는 분석이다. 이 관점에서 보면 “형벌과 축복”은 로맨틱한 문장이 아니라, 윤리의 재건이 곧 파국을 동반할 수밖에 없는 근대적 딜레마를 요약한 말이 된다.
다이스케가 “책임은 내가 지겠다”고 말하는 대목 역시 중요하다. 소세키는 사랑을 ‘순수한 감정’으로 면죄하지 않는다. 오히려 다이스케가 책임을 말할수록, 독자는 더 뼈아프게 깨닫게 된다. 그 책임이란 결국 경제(생계)·관계(우정)·제도(가족/혼인)·평판(사회) 전부를 감당하겠다는 뜻이며, 개인에게 과도하게 전가되는 짐이기 때문이다. 소세키는 사랑을 선택한 개인이 “자유”를 얻는 과정을 그리기보다, 그 자유가 얼마나 잔혹한 비용을 요구하는지 드러낸다.
7. 히라오카라는 거울 ― ‘사회적 피해자’이자 ‘사회적 가해자’
앞에서 보았듯이 히라오카는 단순한 악역이 아니다. 그는 불경기 속 실업자이며, 생활의 압박 앞에서 무너진다. 동시에 그는 미치요를 “거추장스런 존재”로 여기게 되는 태도를 보이며, 결혼을 생활 유지 장치로 취급하는 근대적 남성의 얼굴을 드러낸다. 이 양면성 때문에 『그후』의 윤리 판단은 더욱 어렵다.
다이스케는 히라오카의 피해(실업, 빈곤)를 보며 동정하지만, 그 동정이 곧 미치요에 대한 사랑의 재점화로 이어지면서, 동정은 욕망과 분리되지 않는 감정이 된다. 소세키는 이 지점을 통해 “선의”와 “자기기만”이 얼마나 가까운지 보여준다. 다이스케의 순수는 빛나지만, 그 순수는 타인의 삶을 파괴할 수 있다. 그래서 『그후』의 핵심은 “다이스케가 옳다/그르다”가 아니라, 근대 사회에서 ‘옳음’이 성립하기가 얼마나 불가능한가에 있다.
8. 결말의 ‘흔들림’ ― 파멸인가, 각성인가
소설 마지막 부분에서 다이스케가 “모든 사물들이 흔들리는 것을 느끼며” 끝나는 것은 단순한 절망 묘사가 아니다. 이것은 두 층위로 읽힌다. 하나는 현실적 층위다. 경제적 지원이 끊긴 순간, 그는 정말로 생존 기반을 잃고 사회적으로 고립된다. 다른 하나는 인식론적 층위다. 지금까지 그를 떠받치던 ‘집안의 질서’와 ‘사회적 도덕’이 더 이상 절대적인 기준이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나며, 세계 자체가 흔들린다. 흔들림은 파국이면서, 동시에 근대적 허위가 붕괴한 뒤에야 도달하는 각성일 수 있다.
이 지점에서 『그후』는 『산시로』의 관망을 넘어선다. 즉 소설 『그후』가 엘리트 도쿄 가문의 성인이 된 아들이 자신의 지위를 걸고(혹은 잃을 것을 각오하고) 사회적·도덕적 결과를 대항하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다시말해 다이스케는 ‘생각만 하는 인간’에서 ‘행동하는 인간’이 되지만, 그 행동은 해피엔딩이 아니라 근대적 개인의 고독을 극대화하는 결과로 귀결된다. 소세키의 비관은 바로 여기 있다. 개인이 진실하게 살려고 결단할수록, 사회는 그를 더 강하게 추방한다.
9. 소설 『그후』는 왜 어려운 소설인가
소설 『그후』가 지금까지도 강력한 이유는, 독자가 어느 한쪽에 쉽게 서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다이스케를 순수한 사랑의 영웅으로만 읽으면, 히라오카와 가족제도 속에서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 지워진다. 반대로 다이스케를 이기적 파괴자로만 읽으면, 근대 사회가 개인에게 강요한 삶의 폭력성이 사라진다. 소세키는 이 양극단을 모두 거부한다. 대신, 개인의 내면(자연의 순리)과 사회의 외피(도덕/가족/경제)가 충돌할 때, 둘 다 상처 입는 구조를 드러낸다.
첫째, 근대는 개인의 여유를 빼앗아 “제대로 된 일”을 할 수 없게 만든다. 둘째, 그 근대는 가족과 결혼을 통해 개인을 제도 안에 묶어둔다. 셋째, 개인이 자연의 순리(사랑)를 붙잡으려 하면, 그 사랑은 곧바로 형벌이 된다. 이 사슬 때문에 『그후』의 사랑은 낭만이 아니라, 근대 비판의 언어가 된다.
소설 『그후』를 통해 소세키는 사랑을 찬양하려고 한 것은 아니다. 그는 사랑이 어떻게 윤리가 되려 하는지, 그리고 왜 그 윤리가 근대 사회에서 곧바로 범죄와 추방으로 인식되는지를 보여준다. 따라서『그후』는 “현실에서는 일어나기 어렵다”기보다, 오히려 현실의 구조가 얼마나 비인간적인지를 폭로하는 방식으로 가장 현실적인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 참고문헌
나스메 소세끼, 노재명 역, <그후>, 현암사,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