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면의 결’, ‘여성의 감정사’, ‘삶의 잔흔’을 기록하다
권여선은 현대 한국문학에서 가장 섬세하게 ‘감정의 결’을 포착하는 작가로 평가된다. 그의 작품은 겉보기엔 조용하고 담담하지만, 그 속에는 말하지 못한 상처·불안·후회·슬픔 같은 감정의 층위가 정교하게 축적되어 있다. 특히 그는 여성 인물의 내면을 깊숙이 탐구하며, 소외·자책·자학적 기억을 삶의 일부로 품어내는 방식을 통해 독자를 감정의 심연으로 이끈다. 권여선의 인물들은 삶을 대단히 조용하게 버티지만, 그 침묵의 결 속에는 무수한 ‘사과(謝過)’와 ‘사과(林檎)’가 공존한다.
단편소설 <기억의 왈츠> 또한 작가적 특성이 분명히 드러나는 작품으로, 기억·죄책감·후회·돌아봄·희망의 가능성을 주제로 삼아 “과거를 회복하는 감정의 춤”을 추게 한다.
과거를 뒤흔드는 장소의 힘
소설의 서술자 ‘나’는 정년퇴임 후 가족 외에는 거의 소통하지 않는 중년 여성이다. 그는 우연히 여동생 부부와 함께 서울 외곽의 국수집을 찾아가게 되고, 바로 그 장소가 35년 전 대학원 시절, 허무주의에 빠져 죽음을 생각하던 친구들과 갔던 곳이라는 사실을 떠올린다.
허름한 마당, 상자 속의 강아지들, 술 취한 듯 개를 거칠게 다루던 20대 여성의 모습은 중년의 ‘나’에게 기묘한 감정의 충격을 준다. 마치 그 여성의 무표정한 절망이 지금의 자신의 모습과 다르지 않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이 장소적 자극은 곧 잊고 지냈던 ‘경서’라는 남성의 기억을 연달아 깨워낸다.
무심함으로 흘려보낸 사람
서술자에게 떠오르는 경서와의 기억에서 핵심은 세 가지다.
첫째는 수박 에피소드다. 술김에 억지를 부리는 ‘나’에게 경서는 묵묵히 수박을 사준다. 이는 경서가 마음을 표현하던 방식이자 ‘나’에게 건넨 사소한 호의의 순간이었다.
둘째는 경서가 보낸 일기장이다. 경서는 어릴 때부터 써 온 일기장을 ‘나’에게 보내 읽어달라 한다. 이는 명백한 감정의 고백이자 내면의 공유였다. 그러나 당시 ‘나’는 집안의 재산 분쟁과 아버지의 죽음이라는 거대한 혼란 속에 있었고, 경서의 마음을 헤아릴 여유가 없어 일기장을 대충 읽어버린다. 그 일에 화가 난 경서의 표정조차 이해할 수 없었다.
셋째는 만나자는 편지다. ‘나’가 집에서 쫓겨나며 급히 챙긴 박스를 몇 년 후 열어본 순간, 경서가 보낸 편지가 발견된다. 그 내용은 “1월 13일 시외버스터미널에서 만나자”는 것이었다. 함께 ‘왈츠’를 추자는 은유적 표현까지 담긴 그 편지는 경서가 마지막으로 건넨 손길이었다.
뒤늦게 깨닫는 ‘행복의 출처’
수십 년이 지나, 중년의 ‘나’는 경서가 자기 삶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기를 만들어준 인물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는다. 그때는 ‘사소했다’고 여겼지만, 지금에 와서는 그 사소함이 얼마나 큰 의미였는지 비로소 이해한다. 권여선은 이를 통해 “인생은 지나봐야 안다”라고 하는 단순한 교훈을 넘어서, 기억이 뒤늦게 현재를 구원하는 방식을 그려낸다. 회한은 과거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나’는 여전히 미래를 향해 희망을 품는다. 경서가 편지에 썼던 “두 겹의 차원이 같은 무늬로 만나는 날, 왈츠를 추자”는 문장은 ‘나’를 다시금 삶 앞으로 나아가게 만든 작은 등불이 된다.
과거에만 갇히지 않기 위해 ― ‘왈츠’가 의미하는 것
‘왈츠’는 이 작품에서 여러 상징을 지닌다. 둘이 함께 맞추는 리듬, 삶의 동반자를 발견하는 행위, 기억 속에서 되살아나는 감정의 춤 등이 그것이다. 중년의 ‘나’는 이제야 ‘왈츠’를 출 수 있었던 기회를 깨닫고, 그 날짜인 1월 23일을 잊지 않으려 한다. 양력 1월 23일과 음력 12월 3일이 겹치는 날은, 과거와 현재가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가능성의 시간이며, 그날을 붙잡겠다는 다짐은 더 이상 혼자 살아가지 않겠다는 선언에 가깝다.
기억이 삶을 구원하는 방식
권여선의 <기억의 왈츠>는 화려한 사건이나 극적 반전 대신 기억이라는 조용한 파장이 주는 감정의 힘을 섬세하게 포착한다. 이 소설은 독자에게 이렇게 말한다. 바쁘고 힘들었던 시절에 소홀히 했던 관계들, 무심함에 묻혀 떠나보낸 순간들, 그 속에서 발견하지 못했던 사랑의 손길들이 미래를 살아낼 힘을 준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