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피해자 담론이 지배하는 시대의 역설
오늘날 공적 담론에서 “피해자”라는 말은 가장 강력한 도덕적 언어로 기능한다. 정치인은 법적 책임을 “정치적 탄압”으로 전환하고, 국가와 집단은 비판을 “차별”이나 “자유 침해”로 재명명함으로써 스스로를 피해자로 위치시킨다. 이 과정에서 피해자성은 약자의 고통을 가시화하는 윤리적 개념이 아니라, 정당성과 면책을 동시에 획득하는 권력 장치가 된다.
릴리 출리아라키(Lilie Chouliaraki)는 『가해자는 모두 피해자라 말한다』에서 이 현상을 일시적 왜곡이 아니라 현대 정치·미디어 환경의 구조적 산물로 분석한다. 그녀의 문제의식은 단순히 “누가 진짜 피해자인가”를 가려내는 데 있지 않다. 핵심 질문은 “어떤 피해자성 발화가 공적으로 인정되고 제도화되는가”, 그리고 그 인정의 기준이 누구에게 유리하게 작동하는가이다
2.피해자성의 구성, 전유, 그리고 무기화
1) 피해자성과 취약성의 분리: 고통과 인정은 왜 어긋나는가
출리아라키 이론의 출발점은 피해자성(victimhood)과 취약성(vulnerability)의 개념적 분리다. 사회학과 정치철학에서 취약성은 계급, 인종, 젠더, 식민 경험과 같은 구조적 조건과 밀접하게 연결된다. 그러나 출리아라키는 취약하다는 사실만으로 피해자가 되지는 않는다고 강조한다. 피해자성은 사회적 승인, 미디어 노출, 제도적 공감을 통해 수행적으로 구성된다.
실제로 국제 연구에 따르면, 미디어 접근성이 낮은 집단일수록 자신의 고통을 공적 언어로 번역할 가능성이 낮다. 반면 정치적·문화적 자본을 가진 집단은 상대적으로 작은 피해도 확대 재현할 수 있다. 이로 말미암아 피해자성은 도덕적 사실이 아니라 정치적 성취물로 전환된다. 2) 피해자성의 역사적 형성: 기억정치와 ‘전형적 피해자’의 탄생
출리아라키는 피해자성이 역사적으로 중립적이거나 보편적으로 형성되지 않았음을 지적한다. 20세기 전쟁 기억에서 ‘전형적 피해자’는 주로 백인 남성 병사였다. 이들의 고통은 국가 서사, 보훈 제도, 기념관과 교과서를 통해 반복적으로 재현되었다. 반면 식민지 주민, 여성, 민간인의 피해는 주변화되거나 침묵 속에 배치되었다.
기억연구(memory studies)는 이를 선별적 기억(selective memory)이라 부른다. 피해자성은 여기서 권력과 결합하여 “기억될 가치가 있는 고통”과 “망각 가능한 고통”을 구분하는 기준으로 작동한다.
3) 일본 전후 피해자성의 정치학: 원폭 피해와 책임의 비대칭
출리아라키의 이론이 가장 설득력을 갖는 사례 중 하나가 일본의 전후 기억이다. 일본은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 피해를 중심으로 자신을 전쟁의 피해국이자 평화국가로 재정의했다. 이 피해자성은 국제사회에서 강력한 도덕적 공감을 얻는 데 성공했지만, 동시에 아시아 침략의 가해 책임을 구조적으로 희석시켰다.
역사사회학 연구들은 이를 피해자성의 선택적 전유라 부른다. 원폭 피해는 일본 국민 전체의 정체성 자원으로 확대된 반면, 한국 강제동원, 중국 난징대학살, 위안부 문제는 일본 내부 담론에서 주변화되었다. 이는 피해자성이 반드시 자기반성과 연결되지 않으며, 오히려 자기중심적 평화주의를 정당화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4) 현대 정치에서의 피해자성 무기화: 팬데믹, 포퓰리즘, 미디어
출리아라키는 피해자성의 무기화가 과거의 전쟁 기억에 국한되지 않는다고 강조한다. 팬데믹 시기 구조적으로 가장 큰 위험에 노출된 집단(이주노동자, 돌봄 노동자, 저소득층)은 공적 담론에서 충분히 대표되지 못했다. 반면 정치적으로 조직된 세력은 방역 정책을 “자유 침해”로 규정하며 피해자성을 선점했다.
정치커뮤니케이션 연구는 이를 피해자성 포퓰리즘으로 설명한다. 피해자성은 분노와 억울함을 동원해 집단 정체성을 강화하고, 책임 추궁을 무력화하는 효과적인 수사로 기능한다.
5) 규범적 전환의 요청: 피해자성을 연대의 언어로
출리아라키는 이러한 현실을 비관적으로만 보지 않는다. 그녀는 피해자성을 포기해야 할 개념이 아니라, 되찾아야 할 민주적 언어로 제시한다. 핵심은 피해자성의 독점을 해체하고, 피해 당사자가 자신의 경험을 해석하고 말할 수 있는 제도적 조건을 마련하는 것이다.
일본의 경우, 원폭 피해자성은 아시아 피해자들과의 관계 속에서 재구성될 때만 정의와 평화의 언어로 전환될 수 있다. 피해자성은 인정에 머무르지 않고 제도적 책임과 변화로 이어져야 한다.
3.피해자성 이후의 정치 윤리를 위하여
저서 『가해자는 모두 피해자라 말한다』는 피해자성을 감정이나 도덕의 문제가 아니라 권력, 인정, 제도의 문제로 재배치한다. 출리아라키의 가장 중요한 기여는 우리가 너무 쉽게 사용하는 “피해자”라는 언어가 어떻게 정치적으로 구성되고 오용되는지를 구조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이다.
앞으로 우리는 피해자성을 경쟁과 면책의 언어로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연대와 책임의 언어로 전환해야 한다. 그럴 때 피해자성은 더 이상 권력의 방패가 아니라, 민주주의와 평화를 재구성하는 윤리적 토대가 될 수 있다. 출리아라키의 이 책은 바로 그 전환을 요구하는, 동시대 정치와 미디어를 읽기 위한 필수적인 이론적 지도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