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무는 태양 아래, 인간의 그림자를 쓰다 — 다자이 오사무의 장편소설 『사양』(1947)

1. 몰락의 순간을 글로 붙잡은 작가, 다자이 오사무

 다자이 오사무(1909-1948)는 일본 근대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이자, 인간 존재의 가장 취약한 순간을 기묘한 아름다움으로 형상화한 작가이다. 그의 생애는 끊임없는 시도와 실패, 중독과 방황, 관계의 파열로 점철되어 있었지만, 바로 그 붕괴의 경험이 그의 문학을 지탱하는 원천이었다. 다자이는 인간 내부의 결핍을 숨기지 않고 그대로 드러냈고, 자신의 부서진 내면을 언어로 기록하는 데 일생을 바친 작가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작품들은 대체로 한 가지 공통된 정조를 공유한다. “살아 있음의 부끄러움”, “자기 파괴적 욕망”, “사회적 부적응”, “낙오감과 허무”, 그리고 “살아가고자 하는 미약한 갈망”이 그것이다. 『인간실격』의 요조, 『사양』의 나오지, 여러 단편 속 방황하는 인물들은 모두 ‘시대의 낙오자’로 살아가며 자신의 처지를 조용히, 그러나 깊이 고백한다. 그 고백은 단순 자조나 비극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 자신을 기록해야만 하는 사람의 절박함에 가깝다. 다자이 오사무의 문학세계는 그 절박함의 기록이다.

2. 황혼의 귀족들- 『사양』의 몰락 서사

장편소설 『사양』은 전후 일본의 몰락한 귀족 가문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서사로, 다자이 문학 후기에 완성된 작품이다. 전쟁이 끝난 지 2년, 더는 도시에서 살아갈 수 없게 된 한 귀족 가문이 도쿄 외곽의 거대한 별장으로 쫓기듯 이동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등장인물들은 모두 이미 ‘힘을 잃은 사람들’이다. 어머니는 현실 감각을 잃은 채 우아함만 남아 있고, 동생 나오지는 술과 마약에 빠진 무력한 청년이며, 화자인 ‘나(카즈코)’는 결혼 실패와 사산을 겪고 난 뒤 빈 껍데기처럼 살아간다.

가문은 생계를 위해 집안의 물건을 하나씩 팔고, 결국 마지막 남은 것들까지 정리하는 처지가 된다. 나오지는 출판사를 차리겠다며 돈을 요구하지만, 곧바로 술과 방탕으로 탕진한다. 어머니의 죽음, 나오지의 파국, 그리고 가문이 지닌 가치의 완전한 붕괴 속에서 ‘나’는 극도의 고립과 불안을 느낀다.

이 가운데서도 그녀는 동생의 친구이자 작가인 한 남성을 향해 사랑을 느끼고, 자신의 인생을 바꾸기 위한 마지막 결단으로 그와의 관계를 선택한다. 그 결과 임신을 하게 되고, 이 임신은 그녀에게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상징한다. 몰락의 황혼 속에서 유일하게 떠오르는 새벽 같은 감각이다.

3. 빛과 어둠의 이중주

다자이 오사무의 문학적 특징인 몰락·허무·자기 파괴·구원에 대한 미약한 욕망은 『사양』에서도 강하게 드러난다. 그 중에서도 세 가지 주제가 특히 작품의 심층을 이룬다.

작품의 배경은 일본의 패전 이후이며, 귀족 계급이 더 이상 존재 가치를 가질 수 없는 시대다. 제목의 ‘사양(斜陽)’—지는 태양—은 단지 가문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전후 일본 전체가 겪은 시대적 황혼을 상징한다. 이 배경은 인물들의 내면과 정서가 모두 ‘저물어가는 방향’으로 움직이는 이유가 된다.

나오지는 중독·패배·허무에 빠진 인물로, 다자이 자신의 자화상과도 겹친다. 그의 무기력, 자학적 사고, 반복되는 파괴적 행동은 『인간실격』의 요조를 떠올리게 한다. 나오지의 자살은 다자이의 이후 행적과 겹쳐지며, 이 작품이 그의 마지막 유언처럼 읽히는 이유이기도 하다.

가장 흥미로운 지점은 ‘나’가 몰락 속에서 오히려 새로운 삶으로 이동하려 한다는 점이다. 그녀는 귀족의 딸이라는 껍데기를 버리고, 사랑과 혁명을 통해 자신만의 생존 방식을 찾는다. 그녀의 임신은 절망의 시대에서도 ‘새로운 가능성’이 존재함을 상징하며, 다자이 문학에서 드물게 나타나는 재생의 가능성을 드러낸다.

4. 다자이 문학세계와 『사양』의 만남

장편소설 『사양』은 다자이 오사무 문학의 핵심 요소들이 가장 조밀하게 결합된 작품이다. 몰락과 사랑, 파멸과 희망의 경계가 서로 침투하며, 전후 일본이라는 시대의 공기와 한 인간의 내면이 거의 동일한 결로 움직인다. 다자이는 이 작품에서 인간이 가진 여러 층위의 감정을 숨김없이 드러내고, 시대의 황혼 속에서 어떻게 새로운 아침을 찾을 수 있는지를 탐색한다. 『사양』은 절망의 기록이지만, 동시에 절망 깊은 곳에서 희망이 어떻게 태어나는가를 보여주는 작품이기도 하다. 이 두 감정이 뒤섞인 모순의 세계야말로 다자이 문학의 정체성이며, 그의 작품들이 지금까지도 독자에게 깊은 울림을 주는 이유다.

5. 저무는 시대 속에서 피어난 마지막 빛

다자이 오사무는 몰락하는 세계의 그림자를 누구보다 정직하게 붙잡은 작가였다. 그의 작품세계는 절망을 정직하게 인정하는 데서 출발했으나, 그 절망을 기록하는 순간 문학은 희망이 된다. 장편소설 『사양』은 바로 그 지점에 있는 작품이다. 가족의 몰락, 시대의 황혼, 개인의 파국 한가운데서도 ‘나’는 새로운 생명을 선택한다. 다자이가 생애 마지막에 남긴 이 작품은, 어둠 속에서도 인간이 어떻게 다시 빛을 찾는지 보여주는 마지막 언어의 흔적이라고 할 수 있다. 몰락이 끝이 아니라 변화의 문이라는 사실— 그것이 『사양』이 남긴 가장 강력한 메시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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