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암은 한국을 포함한 동아시아에서 여전히 발생률이 높은 암이다. 지금까지 위암은 주변 조직이 제공하는 성장 인자와 미세환경에 의존해 자라는 암으로 이해돼 왔다. 하지만 2025년 12월 발표된 최신 연구(기초과학연구원(IBS) 유전체 교정 연구단, “Epithelial WNT secretion drives niche escape of developing gastric cancer”, Molecular Cancer, 2025)는 기존 인식을 근본부터 바꾼다. 위암은 발생 초기부터 스스로 성장 신호를 만들어 자립하는 능력을 획득한다는 사실이 명확히 밝혀졌기 때문이다.
정상 위 점막 세포와 위암세포의 결정적 차이
정상 위 점막 세포는 외부에서 공급되는 성장 신호가 없으면 분열하지 않는다. 이는 세포 증식을 통제하는 중요한 안전장치다. 다시 말해, 정상 세포는 혼자서는 자라지 못한다. 그러나 연구진이 관찰한 위암 전암 단계의 세포는 달랐다. 외부 성장 인자를 하나씩 제거해도, 특정 조건을 갖춘 세포는 성장을 멈추지 않았다. 이 차이가 바로 위암의 출발점이다.
위암의 시작은 ‘전암 단계’에서 이미 결정된다
연구진은 위암이 본격적으로 커지기 이전인 ‘전암 단계’에 주목했다. 전암 단계란 아직 암으로 진단되지는 않지만, 암으로 발전할 수 있는 분자적 변화를 이미 획득한 상태다. 이 단계에서 일부 위 점막 세포는 주변 환경의 신호에 의존하지 않고도 살아남고 증식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기 시작한다. 즉 위암의 위험성은 크기보다도 자율성에서 시작된다.
KRAS·HER2 변이가 위암을 자립형 암으로 만든다
연구 결과, 위암 환자의 약 3분의 1에서 발견되는 KRAS 또는 HER2 유전자 변이가 핵심 역할을 한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이 변이가 활성화되면 세포 내부에서 ‘성장하라’는 신호를 전달하는 MAPK 신호 경로가 과도하게 작동한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MAPK 신호는 다시 WNT 신호 분자의 발현을 유도한다. WNT 신호는 위 점막 세포의 재생과 유지에 필수적인 신호로, 정상 상태에서는 주변 환경에서 공급된다.
위암세포는 왜 스스로 성장 신호를 만들까
암 발생 초기, 변이를 가진 위암세포는 WNT 신호를 외부에서 받는 대신 스스로 만들어 분비한다. 이로 인해 암세포는 더 이상 주변 미세환경에 의존하지 않아도 되는 상태로 전환된다. 이 현상은 암세포가 자신의 ‘성장 버튼’을 내부에 장착하는 것과 같다. 연구진은 이를 ‘미세환경으로부터의 탈출’, 즉 자율적 성장 획득으로 설명한다.
신호를 차단하자 암세포 성장도 멈췄다
연구진은 개별 세포 수준에서 유전자 발현을 분석해 MAPK 신호가 활성화될 때 WNT 관련 유전자의 발현이 뚜렷하게 증가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반대로 이 신호 축을 차단하면, 암세포의 자율적 성장 역시 다시 억제됐다. 이를 통해 위암 초기 단계의 성장은 MAPK–WNT 신호 축에 의해 조절된다는 점이 실험적으로 입증됐다.
실제 위암 환자에서도 동일한 현상 확인
이 연구는 실험실 모델에만 그치지 않았다. 위암 환자에게서 얻은 세포로 만든 오가노이드 실험에서도, KRAS 또는 HER2 변이를 가진 경우 외부 성장 신호 없이도 세포가 지속적으로 성장하는 현상이 동일하게 관찰됐다. 즉 이 메커니즘은 실험적 가설이 아니라, 실제 환자 위암에서도 작동하는 현실적인 현상이다.
이 연구가 위암 치료에 주는 의미
이번 연구의 가장 큰 의의는 위암 말기가 아니라 발생 초기 단계에서 암세포의 자율성을 규명했다는 점이다. 암이 완전히 자리 잡기 전, 자율적 성장을 차단할 수 있다면 위암의 진행 자체를 늦추거나 막을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다. 이는 기존의 “커진 암을 치료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위암의 출발점 자체를 겨냥하는 새로운 치료 전략으로 이어질 수 있다.
위암을 보는 새로운 기준
이제 위암을 이해하는 핵심 질문은 바뀌고 있다. “얼마나 커졌는가?”가 아니라, “주변 도움 없이도 자랄 수 있는가?” 이번 연구는 위암의 본질이 ‘자율성의 획득’에 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위암 조기 진단과 예방, 그리고 차세대 항암 치료 전략의 방향을 다시 설정하게 만드는 결정적 연구라 할 수 있다.